숙제처럼 살아온 삶에서, 축제처럼 살아갈 삶으로 1
- 제주에서 만난 변시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반포잠원교육지원센터장 주송현
제가 유독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자연인이다〉나 〈나 혼자 산다〉 같은 방송입니다.
이전에는 왜 이런 프로그램들에 끌리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홀로 훌쩍 떠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올여름 예술제를 준비하며 서초구청과 서초문화예술회관,
반포잠원교육지원센터 관계자분들
그리고 참여한 아이들과 학부모님들 모두 참 많은 애를 써주셨습니다.
덕분에 행사는 성황리에 마쳤지만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뒤늦은 몸살이 찾아온 듯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난생처음 ‘나 홀로 제주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하루에 미술관 세 곳을 둘러보고,
중간중간 북카페에 머물며 책을 읽는
3박 4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주에서 만난 좋은 전시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울림을 준 전시는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변시지 탄생 100주년 특별기념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황토빛 사유, 존재의 바람》
이었습니다.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제주 안에서 견디는 인간을 그린 화가
변시지 화백(1926~2013)은
서귀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도쿄에서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를 사사했으며,
1948년 일본의 권위 있는 광풍회전(光風會展)에서
젊은 나이에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찍부터 주목받았습니다.
1957년 귀국 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75년 쉰 살 무렵 고향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귀향을 기점으로 그의 작품 세계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갖기 시작합니다.
정교한 재현과 다채로운 색은 점차 사라지고,
화면에는 황토빛과 먹빛에 가까운 거친 검은 선만 남았습니다.
바다와 돌담, 초가, 조랑말, 까마귀, 작은 배
그리고 세월의 무게에 등이 굽은 사람이 화면을 채웠습니다.
그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보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실상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황토빛은 단순한 지역색이 아니라,
제주라는 풍토와 인간의 고독이 오랜 시간 교차하며 만들어낸
정신적 색채로 다가옵니다.
이번 전시는 변시지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내 그림에는 나만 없었다」에서는 일본과 서울 시절을,
2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제주에 정착하여
자신만의 ‘제주화’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3부 「나는 바람으로 남을 것이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세 발 의자와 독백 영상,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개되었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공개 작품을 포함한 회화 60점과 아카이브 자료 20여 점은
한 예술가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침묵, 여백 그리고 견뎌낸 존재들
전시장을 걸으며 제 마음에 끝까지 남은 단어는 세 가지였습니다.
‘침묵’, ‘여백’ 그리고 ‘잔존’.
변시지의 후기 작품은 말을 아낍니다.
색도, 사물도, 설명도 줄어듭니다.
이어도, 2005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워낼수록
그림은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어 옵니다.

기다림, 1984
화면 속 인물들은 결코 크지 않습니다.
넓은 황토빛 대지 한편에 작은 사람 하나가 서 있고,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으며, 멀리 배 한 척이 떠 있을 뿐입니다.

열중, 1981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려난 자, 작아진 자 그러나 끝내 떠나지 않고 견뎌낸 자.’

안녕, 1980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까마귀 역시
길조나 흉조라기보다는,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바람 속에서도
돌담 위 자리를 지켜내는
‘견딘 존재’였습니다.
빈 배와 까마귀, 돌담과 기다림은
제주 풍토 속 고독과 삶의 의지를 담아내는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우리는 때로 무리에 뒤처지거나 작아졌다는 느낌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시지의 그림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제주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태풍, 1982
완전함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음 그 자체이며,
똑바로 서 있는 것만이 삶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것 역시 삶이라고 말입니다.
“유독 내게는 바람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다.
그것은 바람 부는 제주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변시지 화백
'숙제처럼 살아온 삶에서, 축제처럼 살아갈 삶으로 - 제주에서 만난 변시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칼럼은 2부에서 계속 됩니다.